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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1901-11-01
년도 1901.11.01.
관련 인물 Baird, 배위량
지역 평안도
기록 유형 보고서
출처 기타
상세기사/위치 THE ASSEMBLY HERALD, November,m 1901, p.425-428.
교단/소속 장로교
장소/지명 평양
번역 정보 AI번역후 편집자교정
평양 선교의 초석을 닦았던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의 숭실학당(Academy) 설립 초기 보고서입니다. 당시 한국인들이 얼마나 교육에 갈급했는지, 그리고 선교사들이 단순한 시혜적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강인한 그리스도인들을 길러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당

(The First Christian Academy in Korea)

저자: 평양, 배위량(W. M. Baird) 목사

평양에서 시작된 교육 사역은 전도 사역이라는 토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도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교육이 뒤따르는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세속적인 교육이 아닌 기독교 교육에 대한 자발적인 요구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지의 학생들이 스스로 비용을 충당하는 '자립형 학생'은 매우 드물었기에, 소년들과 청년들을 외국 원조로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시스템의 영향이 많은 경우 유해(pernicious)하다고 깊이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1897-98년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로, 오랫동안 소망해 왔으나 이제는 사실로 확인된 확신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그리스도인 소년들이 노동에 대한 혐오감과 선비 계층 특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힘들고 고된 노동을 통해 스스로 교육비를 벌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빈약했던 첫해의 시도를 거쳐 우리 곁에 남은 이들은 우수한 소년들의 무리였으며, 이들이 상급반을 형성하고 학당의 실질적인 핵심(nucleus)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소안론(Swallen) 선교사는 등록 인원이 28명으로 늘어났고 평균 출석 인원은 16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해의 사역을 통해 우리 사람(한국인)들 사이에서 교육에 대한 수요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학교 건물과 교구, 그리고 지금까지 전적으로 부족했던 학교의 제반 시설들이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소안론 선교사는 학교와의 관계를 마무리하며 학당 건물을 위해 1,800엔이라는 매우 관대한 기부금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선교 지부(Station) 내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고, 적절한 건물을 짓기 위한 즉각적인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향후 수년간의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선교부 구내와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도 주변 건물들로 인해 혼잡해지지 않을 탁 트인 고지대를 부지로 선정했습니다. 학교 부지 바로 옆에는 산업 부서(Industrial department) 용도로 적합한 양질의 토지도 마련되었습니다.

학교의 현지 관리는 선교 지부의 집행 위원회에 맡겨졌으며, 이 위원회는 학당장과 다른 두 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 지부에서 선출한 두 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초기부터 외국인과 현지인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공동 협력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다른 모든 사역과 마찬가지로 향후 한국 교회가 운영과 지원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될 때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교육 과정 및 교재 개발

지난가을, 학당을 위한 5년 과정의 임시 교육 과정이 채택되었으며, 이와 함께 학당 입학을 준비시키기 위한 초등학교용 6년 과정의 등급별 학습 과정도 채택되었습니다. 교과서가 매우 드물고 미국의 상황과 판이하게 다른 이 땅에서, 교육 과정을 준비하는 작업은 기초를 닦는 일 중 결코 덜 중요하거나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용 학습 과정은 모든 시골 교회에 모델로 발송되었으며, 이곳의 하급 학교들뿐만 아니라 여러 시골 교회 학교들에도 부분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다른 선교 지부 위원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에게도 이 과정안이 전달되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선교 학교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선교 학교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1. 이교도의 고전(유교 경전 등)에서 선택한 교과서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학교의 영향력이 사실상 이교도적으로 변하는 위험.

  2. 고전을 대체할 만큼 충분히 수준 높은 교과서를 제공하지 못해, 학습 과정이 유치하고 무미건조하다는 비난을 받는 위험.

1900년 9월 25일, 학교는 총 30명의 학생으로 개교했습니다. 그 후 인원은 50명의 성인 및 소년들로 늘어났으며, 평균 연령은 21세였습니다. 입학이 거절된 지원자도 최소 50명 이상이었으며, 입학 기준이 높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단념한 이들도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모든 지역이 등록 명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 소년의 집은 약 200마일(800리) 떨어진 의주였는데, 크리스마스 휴가를 마치고 세 명의 신규 지원자와 함께 돌아왔으며, 북부 지역에서도 이미 두 명이 더 지원한 상태였습니다. 그들 중 자비 부담이 가능한 단 한 명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내년 가을에 다시 오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일주일간 눈길을 헤치며 고된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며, 부분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예방 조치 덕분이었습니다.

  1. 5년 과정을 완수할 계획이 없는 학생은 아예 지원하지 못하도록 권고했습니다.

  2. 모든 선교사, 조사(helpers), 교회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지원자들 중에서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가장 자질이 뛰어난 이들만 선발했습니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선발 시스템 덕분인지, 올해에는 단 한 건의 징계 사례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교사진 구성과 운영

사역의 현 단계에서 적절한 한국인 교사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상급 학교 과정을 몇 년간 이수한 후에야 배출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한국 학교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기독교인 교사 한 명을 고용하여 한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897년에 입학한 상급반 학생 한 명은 시간의 절반을 할애하여 초보자들에게 산술과 지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상급반 학생의 협력을 얻어, 보수 없이 매주 지정된 시간에 초보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의무를 회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이들을 가르칠 특권을 요청했습니다. 이들의 공감과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학교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산업의 벌집'이 되었으며, 미래의 교사들이 이 과정에서 확실히 양성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제시되는 유인책(inducements)의 성격이 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에, 영어나 기술, 혹은 세상적으로 유망한 직종을 열어주는 세속적인 유인책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기독교 교육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우고, 현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학당이 그러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임을 알리는 데 주력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조치 중 하나로, 지역 교회의 초등학교들이 거의 전적으로 자립(self-support)의 토대 위에 설립되도록 장려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름에 걸맞은 학교 건물을 마련하지 못해 사랑방이나 개인 주택, 혹은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수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현재 이길함(Mr. Lee) 목사의 효율적인 관리 하에 세워지고 있는 학당 건물은 사역을 위한 적절한 장소를 갖게 된다는 기쁨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이 학교의 존재와 중요성을 알리는 광고 효과도 주고 있습니다. 학교를 시작하는 데 큰 건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시작된 후에는 적절한 건물과 시설이 효율성을 크게 증진시킨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재정 및 산업 부서(Industrial Department) 운영

학교 설립 초기부터 건축을 위해 거액의 예산을 책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헌금을 비싸고 불필요한 실험에 낭비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무적입니다. 한국인 교사 한 명의 급여, 연료비 및 기타 잡비를 제외하면, 이 실험적인 운영은 선교 본부(Board)에 비용 부담을 주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학교의 일반 경비를 충당하는 데 있어 한국인들의 재정적 협력이 올해 부분적으로 확보되었으며, 교회가 학교로부터 혜택을 입게 됨에 따라 더 많은 지원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지난 1월 20일은 잡비 충당을 위한 헌금의 날로 정해졌습니다. 21개 교회에서 53엔 59전의 헌금이 들어왔으며, 몇몇 그룹의 소식은 아직 기다리는 중입니다. 자비량 학생들은 수업료로 매달 150캐시(cash)를 지불하고 있는데, 5월 1일 현재까지 총 20엔 75전이 모였습니다.

등록 학생 중 13명은 평양 시내나 인근 출신이고, 37명은 시골 그룹 출신입니다. 기숙사는 없으나 학생들이 우리가 승인한 집에서 하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올해 1,610캐시(약 2엔 50전 미만)로 양질의 하숙을 제공받았습니다.

자학(manual labor) 부서 또는 자립 부서는 학당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와 연결된 부서입니다. 이 부서의 학생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자립하는 이들이며, 돈으로 자립하는 이들과 노동으로 자립하는 이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부서의 각 학생은 하루의 절반을 일하며 그 대가로 식사를 제공받습니다. 의복과 책은 스스로 마련합니다. 등록 학생의 절반에 가까운 19명이 현재 산업 부서에 속해 있으며, 일 년 내내 비슷한 비율이 유지되었습니다. 세 소년은 인쇄실에서 도제 과정을 거쳐 인쇄 기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습득했고, 그 결과로 주일 학교 공과와 교회 서신, 병원 공지 사항 등 11,150장을 인쇄해 냈습니다.

학생들이 수행한 다른 작업은 다음과 같이 다양합니다.

  • 계약직 노동, 도로 건설, 하급 학교 교육, 소사(janitor) 및 기타 학교 관리, 제본, 모자 제작, 짚신 및 새끼줄 제작, 학당 건물을 위한 자재 준비, 주일 학교 공과를 위한 글자 필사 등.

이 노동의 상당 부분이 돈을 절약해 주기는 하지만 재정적 수익을 창출하지는 못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노동으로 식비를 대신하고 있지만, 더 나은 설비를 갖춘 공장이 없거나 노동이 비생산적인 시기나 종류의 작업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이 부서 자체는 아직 자립하지 못했으며 선교사 친구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역 교회 하급 학교(Lower School)

선교 지부 내의 하급 학교는 학당의 일부는 아니지만, 학당과 밀접하게 접촉하며 큰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이사회 역할을 하는 두 명의 한국인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학교 건물이 온전히 제공되고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선교부에서 부담하지 않는다면 학교가 유지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그들은 이 근처에 자신들의 노력을 뒷받침해 줄 부유한 후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시도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스스로 해낸 결과에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학교는 자체 건물 없이 시작되었고 인원이 늘어남에 따라 빌려 쓰는 집은 곧 앉을 자리조차 부족해졌습니다. 학부모들은 평범한 재래식 학교에서 등급제 학교로 전환된 변화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건물에 대한 큰 필요성이 이사회에서 논의되었고, 대중 집회에서 한국인들로부터 필요한 자금의 절반을 모금할 수 있을지 그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얼마 후, 학부모 월례회 중 하나에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 안건이 상정되었고, 그들은 자발적으로 학교 건물을 위해 182냥(27엔 49전)을 약정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 돈은 현재 학교가 열리고 있는 건물에 투자되었으며, 그들은 적절한 학교 건물의 최소 절반을 사고 지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금액을 보탤 예정입니다. 약 150달러에 달하는 학교의 모든 다른 비용(건물 수리비 2회 포함) 중 절반을 그들이 부담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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