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병헌 (Choi Pyung Hun)
E. M. 케이블 (E. M. CABLE) 지음
최병헌 목사님은 구세대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인물 중 한 분이십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신사요, 전통과 훈련에 의해 학자이며, 본인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목회자이자 교사이십니다. 또한 가장 보기 드문 유형의 기독교인 동지이자 형제이며, 확고한 낙관주의자이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을 굳게 믿는 분이십니다. 현 세대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성품을 지닌 분들이 여전히 자신들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큰 축복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는 1858년에 태어나 이미 회갑(the first cycle)을 지났으며, 본인의 말마따나 ‘다른 사람의 시간(덤으로 주어진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강건해 보이며 좋은 건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국에 선교 활동의 문이 열린 지 3년 후인 1888년 가을, 그는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님의 어학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단계의 목적은 구약성경의 저자들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공자, 부처, 맹자의 가르침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4년을 보내며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1892년 감리교회의 원입교인(probation)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500년 동안 한국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을 따라, 그는 젊은 시절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하여 이름 있는 학자가 됨으로써 명망 있는 한국 가문의 대를 이었습니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이 전통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비바람과 추위, 눈보라를 뚫고 그는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시를 지었습니다.
이 무렵 옛 한국 정부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정부의 관직들은 공로와 학식이 있는 사람보다는 돈으로 관직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분배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승진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1891년에 과거에 성공적으로 급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 선생님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조롱받았고 승진의 기회가 막히자, 그 상황에 깊이 낙담하여 마음과 생각을 종교로 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그는 삶의 실재를 열렬히 구하는 구도자가 되었습니다. 1893년에 그는 세례를 받았고, 1년 후에는 설교할 수 있는 자격(전도사 인가)을 받았습니다.
1895년, 정부는 개혁 정책을 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는 과거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최 선생님은 본인의 아무런 청탁 없이도 '주사(Chusa)' 벼슬을 받았습니다. 1896년(원문 오기 1996)에 그는 H. G.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인 회보(Christian Advocate)』의 편집과 출판에 참여했고, 같은 기간에 배재학당 예배당에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청년회(Young People's Society)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사 벼슬을 하고 있던 1896년에 그는 정부로부터 국가의 제사(sacrifice)를 주관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이 새 신자에게 즉각적으로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주의 깊은 생각과 묵상 끝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과 고백에 어긋난다고 확신하였고, 자발적으로 관직을 포기한 후 기독교 목회 사역에 더욱 전심으로 헌신하였습니다.
1898년에 그는 D. A. 벙커(Bunker) 목사님과 동행하여 일본 고베로 가서 한국어 인쇄를 위한 활자를 조사하고, 가능하면 이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1899년에는 게일(Gale) 박사님과 언더우드(Underwood) 박사님을 도와 구약성경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01년에는 조지 히버 존스 박사님과 함께 한국 최초의 종교 잡지를 편집하고 출판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1901년에 무어(Moore) 감독에게 집사 안수(Deacon)를 받았고, 1909년에 해리스(Harris) 감독에게 장로 안수(Elder,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도시의 여러 목회지를 섬겼습니다. 제일감리교회는 수년간 그의 강단이었으며, 그는 아주 적은 무리에서 크고 번성하는 회중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1903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서울에 있는 외국어 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영예를 정중히 사양하고 더 큰 열정으로 자신의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교회는 그의 능력과 효율적인 지도력을 인정하여 1911년에 그를 제물포 지방의 감리사(district superintendent)로 임명했습니다. 이 직분으로 5년 동안 섬긴 후, 그는 서울 지방으로 파송되어 사임을 요청할 때까지 훌륭하게 사역했습니다. 모든 임지에서 그는 자신이 정직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임을 보여주었으며, 상냥하고 영성이 깊고 공정하며 가장 형제애가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명확하고 힘 있으며 호소력 있는 설교자입니다. 그의 모든 설교는 예화가 풍부하고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매우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요전 날 한 선교사님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최 목사님은 참으로 놀라운 인품을 지니셨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고대 문학의 위대한 학자입니다. 그는 희귀한 이야기와 예화의 보고(mine)입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과거의 지식들을 확보하여 영구적인 형태로 남길 수 있다면 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겸손하여,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면 "제게는 기록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서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를 통해 출판된 두 권의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1923년, 연세가 들어 짐이 무거워짐을 느낀 그는 지방의 공식 직무에서 면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모교인 협성신학교(Union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의 한문학과(Chinese Literature) 및 비교종교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 직분에서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으며, 글쓴이는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한 그의 빛나는 사역의 말년에 그와 함께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감리교회의 역사가 편찬될 때 그의 이름은 특히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많은 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기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