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자 | 1940-07-01 |
|---|---|
| 년도 | 1940.07.01. |
| 관련 인물 | 번하이젤, Charles F. Bernheisel |
| 지역 | 평안도 |
| 기록 유형 | 기사 |
| 출처 | 코리아미션필드 |
| 상세기사/위치 | Vol.36, No.07 (1940), 찰스 번하이젤의 "40년 전을 회상하며" 제1부 |
| 교단/소속 | 장로교 |
| 장소/지명 | 평양 |
| 번역 정보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찰스 F. 번하이젤(Rev. Charles F. Bernheisel, D. D.) 목사
가끔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날짜를 확인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자주 일기장을 펼쳐 그 일에 대해 적힌 것이 있는지 살펴보곤 합니다. 또한, 우리 양 떼의 젊은 세대 중 일부는 우리 같은 노병(grey heads)들이 이 나라에서 사역하던 초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오래된 일기장의 기록이 젊은이들에게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일기를 쓴 우리에게는 옛 일기를 읽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입니다. 다만 초창기에 더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필자는 이 나라에 온 첫 번째 세대의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직전에 도착한, 소위 '2세대' 선교사의 일원이라는 점뿐입니다. 이 옛 기록의 사본이 과연 공개할 만큼 많은 사람에게 흥미로울까요? 이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적어도 몇몇 분은 관심을 가질 수도 있기에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
필자가 포함된 소규모 일행은 1900년 10월 18일, 한국의 제물포에 상륙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출발은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Boxer troubles)'으로 인해 한 달 정도 지체되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척들은 분별력보다는 열정만 가득한 이 순진한 청년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화단은 활동 범위를 중국 본토로 한정했고, 덕분에 우리는 위협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미국 영사관에 이름을 등록하고 그곳에 계신 선교부 선배님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서울에서 하루를 보낸 뒤, 우리는 당시 한국의 유일한 철도 노선을 타고 다시 제물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작은 연안 증기선인 '충재호(Cheung-chae)'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감리교 선교부의 스크랜턴 박사(Dr. Scranton), 폴웰 박사(Dr. Folwell), 에스더 박 박사(Dr. Esther Pak), 케이블 씨(Mr. Cable)가 이번 여행의 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10월 19일 출발하여 평양으로 가기 위해 한국 서해안을 따라 진남포로 향했습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기분 좋게 불던 바람이 강풍으로 변했고, 우리의 작은 배는 어느 섬 뒤로 피신하여 일요일 저녁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일요일에는 항해하지 않는 배를 찾기 위해 한국까지 와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남포에서 우리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증기선(steam launch)으로 갈아탔습니다. 우리는 밤 10시쯤 평양에 도착했고, 강변에서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선교사 일행을 만났습니다. 24일, 나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짐들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시카고의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백화점에서 물품을 준비했는데, 그들은 내 물건 대부분을 하나의 거대한 상자에 담아 포장해 보냈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은 내가 미국에서 집을 통째로 들고 왔다며 오랫동안 나를 놀리곤 했습니다. 상자가 너무 커서 부선(lighter)에서 내리는 것조차 힘들었고, 한국식 달구지에 싣기에도 너무 컸으며, 물론 한국의 지게꾼(coolies)들이 운반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선교부 구역(Mission compound)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상자를 해체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나는 상자 안에서 지내지는 않았고, 마포삼열(Moffett) 목사님 댁 마당 아래쪽에 있는 낡은 한국식 집의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함께 온 렉(Leck) 부부가 그 집의 나머지 공간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노총각이었던 나는 선교 지부의 한 가족과 함께 식사하도록 배정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가정 예배 때, 하인 중 한 명이 새 선교사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당시 나는 그 하인이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나중에 그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27일쯤 되자 나는 정규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언어를 공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나를 위해 선생님 한 분이 채용되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고, 나 또한 그의 언어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한동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10월 28일은 평양에서 맞이한 나의 첫 안식일(일요일)이었습니다. 이길함(Mr. Graham Lee) 선교사님이 아침에 열리는 한국인 성경 공부 반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오후 2시에는 시내 중심부 언덕 위에 막 완공된 새 예배당에서 열린 한국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시내의 유일한 장로교회였습니다. 감리교회는 좀 떨어진 다른 언덕 위에 교회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시 안팎에는 이 두 회중이 전부였습니다. 그날 장로교회 예배에는 약 700명이 모였고, 설교는 한국인이 맡았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도시와 그 주변에서 전개될 위대한 사역의 눈부신 시작이었습니다.
이길함 선교사님은 보름간의 시골 순회 전도를 계획 중이었고, 나에게 동행을 권했습니다. 나는 언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대로 내가 맡게 될 사역이 어떤 종류인지 알아볼 기회이자 시골 사역을 견학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기쁘게 응했습니다.
평양에 도착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29일에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짐을 싣기 위한 말 두 마리와 타고 갈 말 두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짐 말은 각각 '마부(mapu)'가 맡았습니다. 두 명의 하인과 권서(colporteur), 조력자, 그리고 나의 언어 선생님이 동행하여 꽤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도시의 남동쪽으로 향해 평원을 가로질렀고, 산들이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밤을 보내기 위해 이름 없는 어느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길함 선교사님은 즉시 세례 신청자와 학습 교인(catechumenate)들을 문답하는 업무에 착수했습니다. 그날 밤 안에 일을 다 마치지 못해 회중과 함께 경건회를 가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문답을 마친 뒤 예배를 집례하였고, 그 자리에서 세 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여러 명의 학습 교인이 입교하고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험난한 산길을 하루 종일 이동한 끝에 우리는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보상도 없이 밭을 빼앗아 간 금광 광부들(가장 경건하지 못한 자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머물던 집의 주인도 그렇게 밭을 강탈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들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교(paganism)에서 갓 벗어난 그 사람의 마음속에 기독교가 이미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틀 후, 밭을 빼앗아 간 남자가 사망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그의 악행과 그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1월 3일 정오, 우리는 어느 주막(inn)에 도착하여 그날 남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몇몇 그리스도인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오후 시간을 언어 공부를 하며 보냈고, 이길함 선교사님은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는 항상 총을 가지고 다녔는데, 오리나 꿩 같은 야생 동물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나기 전 그는 나에게도 '22구경' 소총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하루는 말을 타고 가는데 바위 뒤로 꿩 머리 하나가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조준한 뒤 사격했고, 꿩의 머리를 명중시켰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이길함 선교사님이 나를 불러 "보통강에 내려가서 오리를 잡읍시다. 거기 아주 많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동의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산탄총을 빌려주었고 우리는 길을 나섰습니다. 과연 강에는 오리가 많았습니다. 나는 강둑을 따라 기어갔고, 어떤 지점에서 오리 세 마리가 나와 일직선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격했더니 한 발에 세 마리가 모두 죽었습니다. 그것으로 나의 사격 기록은 100% 완벽해졌고, 나는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 손에 총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말 네 마리와 한국인 일곱 명, 그리고 선교사 두 명에 대한 주막 비용은 총 60센트였습니다!
11월 11일, 우리는 평양에서 240리(72마일) 떨어진 곡산 시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약방(drug store)에서 묵었습니다. 약사는 종이봉투에 담긴 약재들을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 두었습니다. 11월 12일 새벽 3시 30분에 길을 떠나 오후 4시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120리를 달려왔습니다.
| 분류 | 제목 | 년도 | 관련 인물 | 지역 | 교단/소속 | 출처 | 상세기사/위치 | 번역 정보 |
|---|---|---|---|---|---|---|---|---|
| 교육/의료/기타기관 | 1903년 평양 남자 소학교 연례 보고서 | 1903 | 베어드, 배위량 | 평안도 | THE KOREA FIELD | MAY, 1904, p.166-167. | 원문&AI번역교정 | |
| 선교사 이야기 | 내일이 아닌, 바로 지금입니다 - 선교사들의 눈물 어린 호소문 | 1904 | 노스, 부루언, 에바 필드, 아담스, 존슨 | 전체 | THE KOREA FIELD | FEBRUARY, 1904, No.10, p.146-149.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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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이야기 | 만주의 선구적 성경 번역가 존 로스 | 1915 | 존 로스, JOHN ROSS | 전체 | 장로교 | 코리아미션필드 | Vol.11, No.11, p.314-315.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 인물,신앙유산 | 미 감리교의 Ninde 감독 고종을 알현하다. | 1895.02.04. | 스크랜턴, 언더우드, 나인드 | 경성 | 기타 교단 |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 Vol .18, Iss 5, p.379-380. | AI번역 후 편집자 교정 |
| 선교사 이야기 | 40년 전을 회고하며 (Forty Years Agone) 제3부 | 1940.09.01 | 번하이젤 | 평안도 | 장로교 | 코리아미션필드 | Vol.36, No.09 (1940), 찰스 번하이젤의 "40년 전을 회고하며"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 선교사 이야기 | 40년 전을 회상하며 (Forty Years Agone) 제2부 | 1940.08.01. | 번하이젤, Charles F. Bernheisel | 평안도 | 장로교 | 코리아미션필드 | Vol.36, No.08 (1940), 찰스 번하이젤의 "40년 전을 회상하며" 제2부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 선교사 이야기 | 40년 전을 회상하며 (Forty Years Agone) 제1부 | 1940.07.01. | 번하이젤, Charles F. Bernheisel | 평안도 | 장로교 | 코리아미션필드 | Vol.36, No.07 (1940), 찰스 번하이젤의 "40년 전을 회상하며" 제1부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 매켄지, W. John | 매켄지 선교사와 소래교회 | 1904 | 매켄지, McKenzie | 황해도 | 장로교 | 기타 |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 J. McKenzie of KOREA, p.96-. | AI번역후 편집자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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