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의 숨은 영웅 최명오

하람나라 2026.02.22 17:57:35 촬영시기: 관련 인물: 최명오 지역: 소래 자료 형태: 복원 이미지 출처: 마펫 한국 컬렉션 소장처: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도서관

소래_최명오.png

 

 

초기 한국 개신교회의 진정한 개척자, '조사(助事)' 최명오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포삼열(마펫)과 같은 푸른 눈의 서양 선교사들을 먼저 떠올립니다. 물론 그들의 헌신은 한국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서양의 종교가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유교적 전통이 깊은 조선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요?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오기 전부터 '자생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 선교사와 조선 민중 사이에서 완충자이자 지적 매개자 역할을 감당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적·제도적 초석을 놓았던 위대한 평신도 사역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사(助事) 최명오(崔明悟)입니다.

 

 

1. 서북 지방의 개방성과 소래교회: 복음의 자생적 수용

 

최명오의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義州)는 중국과 마주한 국경 도시로, 당시 상업이 발달하고 외부 문물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높은 곳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서북 지방에 대한 정치적 차별은 오히려 이 지역 지식인들이 새로운 진리와 사상(기독교)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점, 고향을 떠나 황해도 장연군 소래(송천)로 이주한 최명오는 그곳에서 한국 교회사에 획을 긋는 만남을 갖게 됩니다. 바로 만주에서 우리말 성경 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최명오는 외국인 선교사의 설교가 아닌, 동족인 서상륜의 전도와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자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선교사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식된 종교'가 아니라, '말씀(텍스트)을 통해 주체적으로 결단한 신앙 공동체'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2. 1887년의 기적: 언더우드와의 조우와 최초의 세례

 

1887년 봄, 서양 선교사들이 한양에 머물며 아직 본격적인 전도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최명오를 비롯한 소래 지역 청년들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복음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자생적으로 형성된 수십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만남 후, 1887년 언더우드의 사저에서 최명오는 서경조 등과 함께 감격적인 세례를 받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촌부들이 교리적 훈련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죄와 구원, 삼위일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만주에서 유입된 한글 성경을 밤낮으로 읽고 연구한 '텍스트 중심의 신앙'이 낳은 기적이었습니다.

 

3. 선교사의 입과 발이 되다: '조사(Helper)' 최명오


세례를 받은 이듬해인 1888년, 언더우드는 최명오의 탁월한 역량을 알아보고 그를 공식적인 '조사(助事, Helper)'로 임명합니다.

조사란 문자 그대로는 선교사의 '조력자'를 뜻하지만, 실제로는 대리 목회자이자 선교 책임자였습니다. 언어와 문화 장벽, 여행의 제한에 갇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대신해 최명오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뒤에서 묵묵히 도왔던 '바나바'처럼, 최명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선교사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철저히 희생한 초기 교회의 밀알이었습니다.

 

4. 언어의 토착화와 상황화 신학: 성경 개역과 『구세론』 저술

최명오의 가장 위대한 지적 공헌은 바로 '문서 선교와 번역'입니다.

 

첫째, 1887년 성서개역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존 로스의 초기 번역본(로스역)은 평안도 사투리가 심해 전국적인 성경으로 쓰이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의주 출신이면서 한양 말씨에 능통했던 최명오는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중앙어(서울말)로 다듬고, 서양의 신학적 어휘를 조선인의 정서에 맞는 단어로 번역하는 '신학적 개념 창조'의 핵심 멘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둘째, 1895년 마포삼열(마펫) 선교사와 함께 『구세론(救世論)』을 공저했습니다.
길거리 노방 전도가 돌팔매질 등 물리적 핍박에 부딪히자, 지적 호기심이 많은 조선인들을 위해 정제된 변증서가 필요했습니다. 마펫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뼈대를 세우면, 최명오는 이를 한문학적 문체와 친숙한 개념을 사용하여 조선 지식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명저를 탄생시켰습니다.

(조선 민중의 심성에 맞게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여 문서 선교의 새 장을 연 초기 기독교 문헌)

이 책은 단순한 전도지를 넘어, 막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 장로교회 공동체의 완벽한 교리적 교과서로 활용되었습니다.

 

5. 결론: 제도의 정점이 아닌, 기독교 토착화의 거장으로 남다

 

훗날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7인 한국인 목사가 안수를 받을 때, 함께 세례를 받았던 서경조는 그 영광의 자리에 섰지만, 최명오의 이름은 목사 안수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식 목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제도화되기 이전의 암흑기 동안, 외로운 선교사들의 귀와 입이 되어주고, 한글 성경을 정제하며, 신학 변증서를 써 내려간 그의 지적·영적 인프라 구축이 없었다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거대한 결실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기초는 결코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이식으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최명오와 같이 복음의 보편성과 조선의 특수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번역하고 중재했던 한국인 선구자들의 주체적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도의 정점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그 제도를 떠받치는 근원적인 초석이 되었던 '조사 최명오'의 숭고한 영성과 지적 탁월성을 깊이 기억하고 재평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