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봉 목사 (1884~1965)
나의 선친들이 이남으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시던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하다.
어머님으로부터 들었던 김현봉 목사의 모습은 짧게 머리를 밀고 계신 분, 검소한 나머지 밀가루 포대를 옷으로 입으셨던 분이다.
그래서 이 분의 뒤를 이은 염천교회의 이한영 목사도 또한 삭발과 검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었었다.
신학을 공부하던 때 고 천전웅 교수(총신대학 신학대학원)께서 강의 시간에 김현봉 목사 밑에서 주일학생으로 다녔을 때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걸어서 교회까지 걸어갔었던 간증을 듣기도 하였다.
김현봉 목사는 1884년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청년 시절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한 그는 민족의 아픔에 공감하며 러시아 블라디보스크 등지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영적 체험을 한 후 사명을 깨닫고 '평양신학교(제32회)'를 졸업하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현교회의 설립과 '희생적' 목회
1932~1933년경, 그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가난한 동네에 자리를 잡았으며, 공동묘지 근처의 폐가와 다름없던 닭장을 개조하여 아현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화려한 성전보다는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는 자녀를 낳을 수 없고 몸이 약했던 박찬성 간호원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는 개인의 행복보다는 돌봄과 희생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고결한 인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기도와 성경 중심주의
그의 사역을 관통하는 핵심은 '성경대로 사는 삶'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4시면 어김없이 연세대 뒷산에 올라 산기도를 드렸다. 이는 6.25 전쟁 당시 38일간의 금식 기도 체험 이후 더욱 깊어졌으며, 교회의 성령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또한 그는 '무소유'를 실천했다. 겨울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냉방에서 지내며, 음식의 최소한의 허기만 채울 정도로 섭취했다. 교인들이 준 사례비는 모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주일에는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교인이 먹었다(아직도 염천교회에서는 국수를 먹는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넘게 길게 드려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드렸고,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공동체적 삶의 실천
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그는 실질적인 구제에 앞장섰다. 교회 주변의 집 수십 채(약 40~50동)을 사서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함께 살게 했다. 그리고 가나한 신학생들을 위해 직접 성경학교를 운영하며,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교단 정치를 초월
1959년 한국 장로교가 WCC 가입 문제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될 때, 김현봉 목사는 어느 쪽의 정치적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교단 정치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고 강조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그를 따르는 이들은 '아현동파' 혹은 '복음파'라 불리게 되었다.
1965년 3월 12일, 그는 평생을 지켜온 청빈한 사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이 그의 거룩한 삶을 추모하며 눈물 속에 치러졌는데 그의 시신은 생전 그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으며 그 뒤를 1,200명에 달하는 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참고) 1) 임동훈 칼럼 중 십자가 사명, 2) 김현봉 목사의 생활 약력(김신득 유튜브), 3) 나의 어머니의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