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개신교 안수 목사
김창식 목사의 자서전적 생애 스케치
제 삶에 대해 글을 쓴다 한들, 제가 저의 주님(Master)을 위해 한 일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무지한 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제게 부모와 같으신 당신께서 올링거 부인에게 제 삶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명하시니, 그 주요한 사건들을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황해도 수안군 숭동면 생금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1살 때, 저는 구식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살까지 그곳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때부터 21살 때까지 저는 농사일을 했습니다. 21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습니다. 그 후 8년 동안 저는 조선 팔도를 두루 다니며 일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았습니다.
29살에 저는 박노득 양과 결혼했습니다. 그 직후 저는 서양인을 처음 보았고, 그가 예의가 없고 야만인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서양인들이 조선의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의심했지만, 그 소문의 증거를 찾고 싶어서 외국인 밑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F. 올링거(Ohlinger) 목사님의 댁에서 일하는 동안 저는 그의 삶과 올링거 부인의 삶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들에게서 어떠한 악함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들의 삶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곧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올링거 목사님은 제게 마태복음을 주셨고 5장을 펴시며 거기서부터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기뻤고, 나중에 더 공부하기를 원하자 그분은 "성경 문답(The Bible Catechism)"이라는 교리문답서를 주셨습니다. 매일 저녁 그분은 저를 가르치셨고 올링거 부인 또한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사복음서 전체를 거의 외울 수 있을 때까지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H. G.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님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35살 때 올링거 목사님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가셨고, 저는 본처 전도사(local preacher)로서 제임스 홀(James Hall) 의사[선교사]를 따라 평양으로 갔습니다. 1892년 8월, 말랄리우(Mallelieu) 감독의 파송을 받아 홀 의사가 그의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7년 후 저는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평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조선 여관에 머물며 전도했습니다. 1893년 3월, 저는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이사했습니다. 홀 의사는 평양을 여러 차례 장기간 방문하셨고, 부재시에는 제게 사역의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제가 짊어진 큰 책임이었습니다. 책임을 맡은 자로서 저는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평양의 나쁜 풍습을 고치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저는 사도 바울이 겪었던 것과 같은 박해를 받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 모든 시련을 겪었지만, 단 한 순간도 저를 압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었으며, 내 마음속으로는 그 도시의 모든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무렵 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곧 성벽 안에 있던 우리 집에 중국군이 패배했고 무수히 많은 일본군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를 본 도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수많은 이들이 도시에서 도망쳤지만, 저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남겨진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느꼈습니다. 저는 또한 많은 경우에 그들의 육신적인 안위를 돌볼 수 있었고,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비록 우리의 신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실로 매우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홀 의사가 도시로 돌아왔으나 곧 장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2년 동안 저는 평양에서의 사역을 책임졌고, 북한(한국 북부 지역) 최초의 감리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는데, 그 기금은 전적으로 한국인 형제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섯 칸짜리 건물이었습니다(8피트 x 48피트).
1896년 노블(Noble) 박사가 평양에 왔고, 저를 조력자로 삼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온 것을 이야기하려니 다시금 기쁨의 전율이 일어납니다. 저는 더없이 기뻤고, 더없이 감사했습니다. 홀로 여기에 앉아 그 이야기를 하려니, 그 기억에 겨워 혼자 기쁨의 웃음을 짓습니다. 저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미친 사람처럼, 한동안 가만히 앉아 펜을 든 채 상념에 잠겼다가—다시 글을 씁니다.
1899년 저는 삼화로 파송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2년간 사역한 후 평양으로 돌아왔습니다. 3년 후 저는 황해도 신계로 파송받았습니다. 그곳에서 3년을 섬긴 후 다시 평양 제1교회로 파송받았고, 그때 목사관을 재건축했습니다. 저의 다음 부임지는 평양에서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황해도 연안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지방 전도사가 되어 도 전체를 순회했습니다. 그 후 저는 신창, 운산, 덕천, 개천, 양덕, 맹산, 영변, 희천, 원산, 자천 등의 임지를 섬겼습니다.
1901년에 저는 진남포에 거주하며 서평양 지방의 전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04년에 영변 지방 감리사(District Superintendent)로 임명되어 6년 동안 그 직분을 맡았고, 그 후 경기도 수원 전도사로 임명되어 지난 연회 때 해주로 전임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여러 임명에 따라 저는 열 번이나 이사를 하였고, 기독교인이 없는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 48곳에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데 조력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125개의 다른 중심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누렸으며, 약 45개의 다른 지역을 방문하여 전도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는 도보로 여행하며 교회가 조직된 170개의 다른 중심지에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우리 감리교회의 거의 모든 곳을 방문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저는 30년 동안 교회를 위해 일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단 한 번도 병에 걸린 적이 없고, 그 긴 세월 동안 주일 예배를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으니, 이 모든 것에 대해 저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