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자는 1931년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당시 미국의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12~17세)에게 한국 평양의 선교 현장을 소개하고 선교적 도전을 주기 위해 제작된 소책자이다.
서문(FOREWORD)
미국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중고등부(Intermediates and Seniors, 12-17세)의 재정적 후원을 위해 특별 해외 선교 대상(Foreign Missions Objects)들이 지정되었을 때, 청소년부(Young People's Department)가 중고등부 그룹에 보낼 자료를 요청할 수 있는 통신원(correspondent)으로 각 선교 지부의 일원들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통신원들 중 가장 사랑받는 분 중 한 분이 바로 한국 평양의 루이스 B. 헤이즈 양(Miss Louise B. Hayes)으로, 그녀는 가장 생생하고 재미있으며 복음적인 이야기와 사건, 그리고 기타 자료들을 끊임없이 보내왔습니다.
중고등부는 평양 선교 지부(Pyengyang Station)에 6,000달러 규모의 후원 지분(interest)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료, 교육, 전도 등 모든 유형의 사역이 포함됩니다. 의료 사역에 대한 관심은 우리 선교사 의사 두 분과 간호사인 그들의 부인들이 전임으로 헌신하고 있는 기독연합병원(Union Christian Hospital)을 통해 나타납니다. 교육 사역은 남녀 학교들과 성경 학교들 등을 통해, 그리고 전도 사역은 헤이즈 양이 때때로 수행하는 시골 순회 전도와 같은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올해의 연구 주제인 "기독교와 세계의 농촌 생활(Christianity and the Rural Life of the World)"에는 한국에 관한 연구 도서인 "한국—여명의 땅(Korea—Land of the Dawn)"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중고등부 지도자들이 한국 연구 수업을 진행할 기회를 기쁘게 맞이할 것이며, 이 소책자는 그러한 그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평양에 관한 보충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이 소책자의 자료는 주로 헤이즈 양의 펜에서 나온 것입니다.
— 메리 E. 무어 (Mary E. Moore)
한국 평양에서의 사역 (At work in PyengYang, KOREA)
그 시작은 이러했다 (How it all Began)
(정착할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토마스 목사(Rev. Mr. Thomas)였습니다. 그는 1865년 중국 정크선을 타고 황해도(Whanghai province)의 (중서부) 해안을 따라 한문 성경을 배포했습니다. 이어 1866년에는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와 연계하여, 한문 성경을 가지고 미국 상선(제너럴 셔먼호)을 타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배의 선원들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도시 바로 아래 강변에서 한국인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불태워졌으나, 숨을 거두기 직전 '작은 붉은 표지의 신약성경' 몇 권을 나눠주고 짧게나마 복음을 전한 뒤였습니다. 훗날, 이 책들을 읽고 몇몇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되었습니다.
사무엘 A. 마펫(Rev. Samuel A.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 목사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토마스 목사)를 태웠던 배의 닻이 걸려 있는 바로 그 성문을 통과하여 평양으로 진입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마펫 목사는 한때 성난 군중들에게 붙잡히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의 아이들을 죽여 그 눈을 약으로 쓴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 한국의 전체 선교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위험과 더불어 질병과 역병이라는 더 큰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1895년, 전체 선교사들은 본연의 사역을 잠시 내려놓고 한국인 콜레라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이 질병과 성공적으로 싸워 마침내 퇴치하였습니다.
이것들은 평양에서의 사역이 세워지는 과정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에 불과합니다.
어느 하루의 일과 (All in a Day's Work)
오늘 아침, 선교부 구내 길에서 이웃을 만났습니다. 그녀가 묻더군요. "그래서, 당신은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글쎄요, 내가 뭘 하고 있냐고요? 나는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몇 가지 중요한 쪽지들을 발송한 뒤, 8시 30분에는 의사 부인을 대동하고 기숙사를 순회하며 아픈 사람은 없는지 살폈습니다. 기숙사와 교실에는 약 천 명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잠을 자는데, 어떤 방은 어찌나 꽉 들어찼는지 다리를 다 뻗고 잘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그리고 각자 음식을 해 먹는 불규칙한 취사 여건 속에서 위로와 아스피린이 필요한 두통 환자가 가끔 발생하는 것은 놀라울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크고 작은 배탈이 더 많이 나곤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돌봐야 했던 환자는 단 세 명뿐이었고, 그중 정말 심각하게 아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다음 한 시간은 여성들과 인사를 나누는 데 보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필수적인 일과인데, 왜냐하면 이 여성들은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대해주어야만 평화롭게 일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소를 불문하고 오늘 아침에는 약 1,300명이 모였는데, 그들과 악수하고, 아기들을 칭찬해주고, 슬픈 사연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질문에 답하고, 교실을 안내하는 등, 바쁜 안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 빠진 할머니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유능한 일꾼들, 예쁜 젊은 엄마들, '선생님' 곁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들, 그리고 온갖 크기의 아기들까지. 모두가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고 행복하며 즐거워 보입니다. 나는 이 일이 정말 좋습니다.
10시가 되면 남자 성경 학교(Men's Bible Institute) 채플 시간이 되는데, 45세 이상의 여성들은 그곳에 참석합니다. 젊은 여성들과 소녀들은 우리 측 예배당에 모입니다. 고등 성경 학교(Higher Bible School) 졸업생이 설교를 전했는데, 비록 정해진 시간을 넘기긴 했지만, 아주 감동적인 메시지였습니다. 그 수많은 얼굴의 물결을 바라보는 것에서 오는 영감이란! 한국의 '신여성(modern girl)', 빛나는 얼굴들, 집에서 짠 명주 저고리들, 흥미로워하는 표정들, 그리고 즐거움이나 근심 혹은 새로운 결단을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채플이 끝나면 군중들은 각자의 교실로 흩어집니다. 내 임무는 출석부가 제대로 배부되었는지, 교사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하루 37시간 분량의 수업이 진행되니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공부하는 동안 나는 남자 서기들의 업무를 지시하고, 정오에 있을 사진 촬영과 관련해 경쟁 관계인 두 사진사를 인터뷰하고, 시골에서 새로 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환자들을 방문하고, 정문에서 양말과 사과를 파는 노점상 아주머니를 설득해 자리를 옮기게 하고, 매서인(Colporteur)과 책 판매에 대해 논의하고, 앞 못 보는 거지를 구내 밖으로 안내하고, 수십 개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다 종이 울리면, 내 임무는 1,300명의 여성을 한 카메라 앵글에 다 들어오도록 자리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자리를 잡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고, 그 일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출석부를 들고 순회를 돌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쯤 집에 들러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서기들과 함께 시골 선교회에 보낼 선교 편지를 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출석부를 가지러 갔을 때, 한 방에 여성들이 웅크리고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그들은 귀신 들렸다고 여겨지는 한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고, 오히려 선한 인상이었으며 비정상적인 기색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 둘러앉은 대여섯 명의 여성들이 미친 듯이 통성 기도를 하며 손으로 그녀를 마구 때리고(whacking) 있었습니다. 나는 그 여인이 안쓰러웠고, 정말 귀신이 들린 것인지도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그 불쌍한 여인을 때리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나는 5시 30분까지 사무실에서 일한 뒤, 저녁을 먹고 잠시 쉬러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에는 서문 교회(West Gate church)에서 열리는 통상적인 대형 집회 대신, 그룹을 세 개의 노회(presbyteries)로 나누어 별도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중 두 곳에 참석했고, 평서 노회(Western Presbytery)에서는 8시에 발언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11시가 되어서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자정입니다. 오늘 하루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여러분이 알았으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노마 (Noma)
노마는 겨우 열세 살이었지만,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 또다시 마을에 갔다가는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아버지도 무섭지 않았고, 악귀가 씌일 것이라며 소리 지르고 야단치는 어머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험준하고 좁은 산길을 넘어, 골짜기를 지나고 또 다른 바위산 줄기를 넘어야 하는, 오빠들이 덤불 뒤마다 거대한 호랑이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던 그 먼 마을로 가는 길조차 무섭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먼 마을의 교회, 즉 '예수교(Jesus doctrine)'가 전파되는 그곳에 혼자 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노마는 작은 놋그릇에 하얀 조약돌을 하나씩 넣었습니다. 조약돌이 일곱 개가 되면 그날이 교회에 가는 날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노마는 세수를 하고, 길게 땋은 검은 머리에 가장 아끼는 붉은 댕기를 드리고, 새 분홍 저고리를 입고는 그 길고 험한 길을 걸어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가장 먼저 어린이 주일학교가 열리는데, 아이들은 목청껏 예수님에 대한 사랑스러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면 선생님들이 '그 책(성경)'을 읽어주고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일학교가 끝나면 부인들의 주일학교가 이어지는데, 노마는 마치 엄마를 따라온 수줍은 소녀인 척하며 어느 마을 아주머니 뒤를 따라 교회 안으로 슬그머니 다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노마는 더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이 끝나고 남자들의 모임이 시작될 때는, 어린 소녀가 남자들의 주일학교에 들어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즐거운 일이 있었는데, 한 젊은 여성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동안 그들은 바닥에 앉아 글자들을 바라보며 "가-갸(Kah-kyah), 거-겨(Ka-Kya), 고-교(Ko-Kyo), 구-규(Ku-Kyu)"를 따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영광스러운 날, 노마는 이 낯익은 글자들이 바로 '그 책(성경)'에 있는 글자들이며, 자신이 쓰는 말들이 바로 이 '가'와 '갸'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은 교회와 얼마나 달랐던지요. 술이 다 떨어졌다며 반쯤 취해 화를 내는 아버지, 긴 장죽(담뱃대)을 입에서 떼는 시간이라곤 오직 딸의 불순종을 꾸짖을 때뿐인 어머니, 마을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는 큰오빠, 그리고 보살핌을 받지 못해 꾀죄죄한 모습으로 뛰어다니는 어린 동생들. 그러니 노마가 이 '예수교'가 자신의 작은 마을에도 들어와 집안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 놀라운 일일까요?
매일매일, 그리고 매주, 노마는 누군가 와서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웃 마을에서 부인들 몇 명이 온 적은 있었지만 그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노마의 아버지가 엉뚱한 질문들로 조롱하고 사람들이 크게 비웃자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을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했지만, 노마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느라 바쁘신가 봐." 노마는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우리 마을이 너무 작아서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신가? 그러니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어."
노마는 무서울 게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냇가를 따라 내려가 '큰길(신작로)'에 닿았고, 그곳 돌 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소달구지가 지나갔고, 자전거를 탄 청년이 지나갔으며,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여인도 지나갔습니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년들의 무리, 갓을 쓰고 수염을 땋아 내린 채 작은 당나귀를 탄 노인, 등짐으로 땔감 덤불을 잔뜩 짊어진 두 소년도 지나갔습니다. 여기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때, 자전거를 탄 한 젊은이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지역 담당 전도사(evangelist)였습니다.
노마는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두 팔을 벌리고 그 앞을 막아섰습니다. 남자는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얘야, 뭐 하는 거니?" "아, 제발 우리 마을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제발요, 네?" "언젠가는 가마." 젊은 청년이 말했습니다. "지금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읍내로 가야 한단다."
" '언젠가'는 안 돼요!"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오늘이요. 지금 당장이요.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 제발 와주세요." "하지만 얘야," 남자가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오늘 밤 읍내에서 회의가 있어. 난 꼭 거기 가야 한단다. 다음에 가마, 아마도." "하지만 오늘 밤 만나는 그 사람들은 다 예수님에 대해 알잖아요, 그렇죠?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하나도 모른단 말이에요. 와서 그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실래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잘 지낼 수 있잖아요."
젊은이는 다시 자전거에 오르려 했습니다. "안 돼요, 안 돼!"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습니다. "못 가요." 그러고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거머리처럼 매달렸습니다.
전도사는 난처했습니다. 이 고집 센 아이를 어떻게 떼어놓아야 할까요? 만약 아이의 소원대로 한다면?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가기로 했습니다. "그만 울어라, 이 녀석아. 네가 이겼다! 앞장서거라, 같이 가마."
하지만 노마는 속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설픈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아저씨가 먼저 가세요." 노마가 말하고는 마지못해 옷소매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한국의 그 특별한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노마의 어머니를 포함한 마을 사람 몇 명이 회심했습니다. 몇 달 후 선교사가 그 마을을 방문했고, 모임이 시작되었으며, 건물이 기증되었습니다. 노마는 그 고을(county)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건 제 거예요, 정말 저만의 교회예요." 노마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김덕신(Kim Talk-Sin) 할머니와 도둑들
김덕신(Kim Talk-Sin) 할머니는 최근 75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노인입니다. 그녀는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약 30년 전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 우리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매번 도시로 나오곤 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전도에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비록 그녀가 전도한 모든 사람이 회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 자신의 노력으로 세례를 받고 훌륭한 교인이 된 사람을 102명이나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약 10년 전 어느 날 밤, 세 명의 도둑이 그녀의 작은 집에 침입했습니다. 도둑이 탐낼 만한 물건은 별로 없었지만, 그들은 놋그릇 전부와 털배자(털 안감을 댄 저고리), 그리고 몇 안 되는 귀중품들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해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위험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고, 얼마 안 되는 자신의 보물들을 지켜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 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들은 놀라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때 한 명이 발로 그녀를 차며 입 다치라고 소리쳤습니다. 노부인은 일초도 멈추지 않고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 주여, 이 사람은 자기 어머니뻘 되는 늙은 불쌍한 여인을 발로 차고 있습니다. 오 주여, 이제 그는 회개해야 할 죄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주여, 저를 발로 차고 제 물건을 뺏어가는 이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옵소서." 도둑들은 그녀를 멈추게 할 방법을 몰랐고, 다시 발로 차기에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서둘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몇 달 후 김씨 할머니(Kim-si)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도둑들 중 한 명이 보낸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리고 할머니의 기도를 들은 후 죄를 자복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어 결국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노라고 전해왔습니다. 그는 그 이후로 계속 교회를 다녔고, 이제 세례 문답을 통과하여 곧 세례를 받게 되었다며, 이 모든 것이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작년에 75세의 노구인 김씨 할머니는 시골 여성들을 위한 우리의 대규모 사경회에서 공부하기 위해 왔었습니다. 그 수업에는 약 1,300명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있었고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벽 5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것부터 저녁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교실 바닥에 이불을 펴는 밤 10시까지, 여성들은 분주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그중 아는 사람이 많았기에 옛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고, 가족들과 마을 소식을 듣는 것을 좋아했으며, 선교사들을 보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늙은 육신은 쇠약했습니다. 그녀는 사경회를 무사히 마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되어, 그녀는 수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꿈속에서 그녀는 천사와 아름답고 큰 집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그녀를 그 집으로 인도하며 말했습니다. "들어가서 사시오." "아니, 괜찮습니다." 노부인이 말했습니다. "전 늙었고 곧 천국에 갈 겁니다. 이사할 가치가 없어요. 천국에 갈 때까지 그냥 제 낡은 흙집에서 살겠습니다." "허허,"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이것이 바로 천국에 있는 당신의 집이라오." "오, 정말입니까?" 김씨 할머니는 기쁘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이사하겠습니다."
다음 날 그녀는 딸에게 그 환상 이야기를 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내 천국 본향으로 간다. 너희가 울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내 장례식에서는 오직 기쁜 찬송과 기쁜 얼굴들만 보고 싶다. 슬퍼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 다오."
일요일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교회에 가서 모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그녀는 평온히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다시 깨어나지 않을 잠이었지만, 우리는 그녀가 천국 본향에서 눈을 떴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정훈택 (Chung Hoon Taik)
정훈택은 현재 평양 학교(Pyengyang Academy, 숭실학교로 추정됨)에 재학 중입니다. 그는 원래 청주에 있는 관립 사범학교 학생이었으며, 그곳에서 가장 똑똑하고 호감 가는 학생 중 하나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가족은 모두 비기독교인입니다.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으나, 훈택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교육받기를 원했습니다. 사범학교 측에서도 그의 뛰어난 학업 성적과 바른 품행을 보고 그를 도왔습니다.
청주에서 공부하는 동안, 훈택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동이 트기 전 하숙방을 나와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는데, 교회 문은 기도하는 이들을 위해 항상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기도하던 중에 그는 그날 사범학교의 특별 행사에 가는 대신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라는 내면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 행사에는 "일본의 운명을 태고로부터 인도해 온 신령의 통치로부터 비롯된 은혜에 감사하며" 일본 천황의 사진(어진) 앞에 절을 하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훈택은 그 마음에 순종하여 학교 대신 교회에 머물렀고, 주일학교와 다른 예배들에 참석했습니다. 다음 날 사범학교에서 선생님이 왜 주일에 결석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나 천황에 대한 불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가 사람이나 신의 형상 혹은 사진 앞에 숭배하는 행위로 보일 수 있는 절을 하는 것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긴 논의가 이어졌고, 결국 훈택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에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 학교나 내 조국의 규칙과 상충된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어기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음 날 그는 훈택을 매우 아끼던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훈택은 자신의 장래에 대한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자 산속의 조용한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8시간 동안 기쁨으로 묵상했습니다. 밤 11시쯤 눈보라가 몰아쳤고 그는 추위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가까운 바위 위에서 표범의 푸른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는 표범이 덤벼들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 위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기도 후 그는 일어섰고, 짐승을 쫓아버리기 위해 성냥에 불을 붙여 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짐승은 공격하지 않았지만, 훈택이 산 아래 불교 사찰로 내려갈 때까지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가 승려들을 깨우자, 그들은 그 산에서 표범이 자주 목격되지만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청주로 돌아온 훈택은 목사님과 상의했고, 목사님은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믿는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또한 학교 교장에게 찾아갔는데, 교장은 훈택과 같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이들에게 천황의 사진 앞에 절하도록 가르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퇴학시켜야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명예스럽게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장은 공개적으로 그의 품행이 모범적이며, 비행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학생들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훈택은 선교사 중 한 분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평양에 있는 기독교 학교(Christian Academy)에 입학하도록 주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마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초기 개종자들의 순교자적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천적 기독교 (Practical Christianity)
어느 날 한국의 한 매서인(Colporteur, 성경 판매 전도자)이 길을 지나다가, 언덕 비탈에 있는 토굴 깊숙한 곳에 한 남자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서인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굴 밖으로 막 나오자마자, 위쪽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굉음과 함께 굴 전체가 함몰되고 말았습니다. 그 남자는 간발의 차로 죽음을 피했다는 사실에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매서인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밖으로 불러내지 않았더라면, 저는 산 채로 묻혔을 겁니다!"
그러자 매서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운명에 대해 말해주려고 불러낸 것입니다. 인간이 빠져 있는 죄의 구덩이와,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고 싶습니다."
그 남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복음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이 '이토록 큰 구원'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줄 작은 책자를 받아 들었습니다.
외팔이 어머니 (The One-armed Mother)
한 팔이 없는 노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평양에서 열리는 남성 사경회(men's class)에 참석해 보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아들은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들이 갈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어머니가 굶거나 얼어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에, 이 고집 센 노인네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하고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회심하였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50엔에 팔려 간 여인 (Sold for Fifty Yen)
한 소녀가 아주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아이를 낳은 직후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시어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으나 그 아기가 죽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아기를 빼앗아 자신의 아이처럼 입양하고는 아이의 생모인 며느리를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50엔에 팔아넘겼습니다. 그 후 그녀는 도망쳐서 평양으로 왔고, 지금은 우리 장로교 학교 중 한 곳의 근로 부서(work department)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어 공부하고 있습니다.
평양의 또 다른 일꾼들 (Some Other Workers at Pyengyang)
조선(Chosen)에서 29년간 선교사로 사역해 온 찰스 A. 클라크 목사(Rev. Charles A. Clark, D.D., 한국명: 곽안련)는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며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오랫동안 있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산전수전('bumped the bumps')을 다 겪었습니다. 우리는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나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었고, 불타는 마을들 사이를 지나며 몇 주 동안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무장한 사람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오인하여 죽이려고 쫓아왔던 적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몇 주씩 말을 타고 여행했고, 밤에는 난방도 되지 않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짐과 떨어져 고립되는 바람에 며칠 동안 한국 쌀밥과 김치(pickle)만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삶은 동부콩(cow peas)과 소금만 먹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성도들이 먹는 음식이었기에 나 또한 견딜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전거로, 배로, 달구지로, 당나귀로, 그리고 튼튼한 두 다리로 수백 마일을 여행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1903년 장마철에 4일 동안 120마일(약 193km)을 걸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내가 온 것을 후회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 급여의 열 배를 주는 미국의 가장 훌륭한 교회 목사로 가느니 차라리 한국의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이 사역에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한국 소년 소녀들이 자신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클라크 박사님 부부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빈민 아동을 위한 구락부 (A Club for Poor Children)
1928년 평양에 부임한 프란시스 킨슬러 목사(Rev. Francis Kinsler, 한국명: 권세열)는 거리에 넘쳐나는 수많은 빈민 아동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회로 인도할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도시의 가장 열악한 지역에 있는 시내 건물의 2층에서 두세 명의 한국 청년들과 함께 일종의 "야간 구락부(night club, 야학)"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약 12명의 소년이 모였으나, 지금은 도시 곳곳에 흩어진 클럽에서 매일 몇 시간씩 예배드리고, 공부하고, 뛰어노는 500여 명의 빈민 아동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삶의 대로와 샛길에서 모여든 아이들로, 철저하게 '돈이 없는 계층(moneyless class)'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의 집은 가난으로 비참하기 그지없기에, 아이들은 일찍 와서 늦게까지 머물다 갑니다.
이 클럽들은 대학, 중등학교, 신학교, 그리고 고등 성경 학교(여성)에서 선발된 학생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성경 학교의 자활 부서(self-help department) 소속 소년 12명과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몇몇 소년들, 그리고 아무런 보수 없이 봉사하는 두 청년이 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클럽은 학습, 예배, 체육 활동 및 특별 모임으로 구성된 일과표를 따릅니다. 프로그램에는 매일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의 성경, 조선어, 일어, 산수, 지리 공부가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와 일반 과학도 조금씩 다룹니다. 성경 이야기와 선행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줍니다.
어느 날 밤, 한 클럽에서 토론회가 열렸는데 각 팀에서 4명의 연사가 나섰습니다. 소년 중 한 명이 사회를 보았고 다른 아이들은 찬송과 성경 봉독을 인도했습니다. 토론 주제는 '사랑과 무력 중 무엇이 더 우월한가'였는데, 소년들은 나폴레옹, 카이사르, 톨스토이, 삼손, 다윗,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들을 인용했습니다. 정말이지 전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모든 소년이 명쾌한 연설을 해내어 책상을 치며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소년들은 그룹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클럽에 다닌 지 좀 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예' '아니오'라고 말하며 일어서는 것조차 못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결과는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빈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이 사역의 목적은 그들에게 복음을 알게 하여 기독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즐거움 (Fun in Korea)
한국인들이 저녁 친교 모임(social evening)을 열 때면, 보통 찬송과 성경 말씀, 기도로 시작합니다. 다과는 그때 내오거나 혹은 모임이 끝날 때까지 아껴두기도 합니다. 다과는 주로 과자(일본식 전병 등과 비슷한)와 아주 달콤한 차(종종 진짜 차 성분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그리고 작은 귤이나 사과로 구성됩니다. 때로는 딱딱한 사탕이나 긴 막대 모양의 엿(taffy)이 나오기도 합니다.
오락 시간에는 보통 종이 쪽지를 돌리는데, 손님들이 그중 하나를 뽑습니다. 각 쪽지에는 수행해야 할 '벌칙(stunt)'이 적혀 있습니다. 노래 부르기, 이야기하기(주로 한국의 전래 동화나 재미있는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춤추기(보통 스카프를 두르고), 또는 동물(당나귀, 닭 등) 소리 내기 등이 그것입니다. 손님들은 번호에 따라 지정된 벌칙을 수행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인기 있는 놀이는 성극(dramatization)인데, 미리 준비하거나 즉흥적으로 하기도 하며, 여리고성의 함락이나 에스더 이야기 같은 성경 내용을 주로 다룹니다. 그들은 또한 잘 알려진 곡조에 직접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한국식 식사는 약 1피트(약 30cm) 높이의 상에 차려지며, 손님들은 바닥에 앉습니다. 단 음식(sweets)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미국에서는 쉽게 대접하기 힘든 까다로운 한국 요리들 대신, 작은 과자나 견과류 등이 먼저 나오기도 합니다. 식사의 주된 부분은 밥인데 각자의 그릇(사발)에 담겨 나오며, 닭고기나 쇠고기 국 또한 깊은 대접에 담겨 나오는데 국물 속에는 고기 조각, 파, 채소 등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귤이나 사과는 식사 마지막에 제공됩니다.
봉사의 기회 (Opportunities for Service)
구함 — 신발 주머니 (Wanted—Shoe Bags)
조선(Chosen)에서는 여성들과 소녀들이 교회 문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데, 수백 명이 신발을 밖에 벗어두다 보니 서로 뒤섞이게 됩니다. 때로는 신발을 싸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신문지를 나눠주기도 하지만, 종이가 찢어지기도 해서 별로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어떤 소녀 그룹들이 한국의 자매들이 신발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어 보내주면 어떨까요? 이 주머니들은 평범하거나 화려한 짜투리 천들로 만들 수 있으며, 크기는 폭 7인치(약 18cm), 길이 11~12인치(약 28~30cm) 정도에 입구를 조일 수 있는 끈이 달려 있으면 됩니다. 1년에 2,000개의 주머니가 있다면 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여성과 소녀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은 구글번역 도움을 받아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