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이야기

평양 아카데미(Pyeng Yang Academy)

by 하람나라 posted Jul 1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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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1904-02-01
년도 1904
관련 인물 소안론, 스왈론, 박자중, 정창윤, 베어드, Baird, Swallen
지역 평안도
기록 유형 보고서
출처 THE KOREA FIELD
상세기사/위치 FEBRUARY, 1904, No.10, 155-157
장소/지명 평양
번역 정보 AI번역후 편집자교정

1903년 9월, W. M. 베어드(W. M. Baird) 박사의 연례 보고서에서

아카데미는 10월 8일 65명의 학생이 출석한 가운데 개학했습니다. 올해 총 등록 학생 수는 72명입니다. 전년도 학생들 대부분이 출석했습니다. 평양과 선천 선교 지부(station)의 모든 지역에서 학생들이 왔으며, 그중 47명이 평양 시내와 인근을 넘어선 타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은 우리 학교가 지닌 대표성을 잘 보여줍니다.

작년의 각 반이 한 학년씩 진급함에 따라 가르쳐야 할 반이 5개가 되었으며, 최상급 반에서만 정원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상설 교사진은 교장인 저와 한문 교사인 한국인 박자중(Pak Cha Choong), 그리고 두 명의 학생 교사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지냈으며 한 해 동안 중단 없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저 외에도 선교 지부의 다른 선교사들 대부분이 각자의 다른 업무가 허락하는 한 기꺼이 가르치는 일에 진심으로 협력해 주었습니다. 비록 교사 명단에 오른 이름은 많았지만, 주당 총 수업 시간은 한 사람이 계속해서 가르쳤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시간만큼에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고, 때로는 거의 모든 선교사가 평양을 부재중이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교육이 필요했기에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스왈런(Swallen) 목사님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기 위해 5월의 일부를 할애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순회 선교 계획을 변경하셔야만 했습니다. 선교부의 이러한 지원은 비록 지속적이거나 정기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학교의 존립에 필수적이었으며, 앞으로도 이 지원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제공되는 교육 자체로서도 귀하지만, 각 선교사가 학생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품성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순회 사역을 비롯하여 이미 다른 사역들로 과중한 업무를 짊어진 선교사들의 의무가, 학교 운영에 있어 그토록 필수적인 규칙성을 안타깝게도 저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5개 반의 일상적인 수업을 제공하는 일, 즉 교육과정을 채우기 위해 평균적으로 하루 25회의 암송 수업(recitations)이 요구되는 일은 명백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였습니다. 교사진의 아무리 많은 노력으로도 모든 반에 충분한 수업을 제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한 명의 상주 선교사가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여러 학급과 실업부(industrial department)까지 돌보면서, 아직 학업을 이수 중인 학생 교사들만을 정규 조수로 두고, 다른 선교사들은 순회나 다른 형태의 사역에 몹시 바쁘게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학교를 운영하려 시도하는 것은 유례없는 실험입니다. 사역의 초기 단계에는 이렇게 해보려 노력했지만, 이제 학교는 학교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 존속을 위해서라도 전적으로 준비된 선교사 한 명의 시간을 더 온전히 필요로 합니다. 작년에 했던 말은 올해 두 배로 사실이 되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은 더 전문적이고 기술적으로 변하며, 더 많은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학교에 상주하며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또 다른 외국인 교사가 몹시, 그리고 시급히 필요합니다."

학생과 학급의 증가는 교사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면서도, 결과적으로 개별 학생과 각 학급이 받는 교육의 양은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시간표에 적힌 과목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생활비의 증가, 그리고 죄와 세속으로 향하는 일반적인 유혹들로 인해 이전 어느 해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습니다. 두 명의 학생은 미국으로 갔습니다. 한때 어떤 제조 회사가 한국인들을 하와이 노동자로 무료 수송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에 가기를 희망한 여러 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려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계층 사이에서도 큰 동요와 흥분이 일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몇몇 이들은 저 멀리 있지만 겉보기엔 너무나 가까워 보이는 엘리시온(낙원)에 도달하려는 강력한 유혹에 빠져 도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믿음을 저버리기도 했습니다. 아카데미 소년들 사이의 흥분은, 예전에 미국에 갔던 동기들이 '그곳의 자선가들이 학생 수가 20명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며, 20명이 되면 그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줄 것'이라고 전해온 이야기들로 인해 더욱 커졌습니다.

하와이로 갈 기회가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철회되면서, 학생들 사이의 동요는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가장 큰 피해는 몇몇 학생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자신들의 모든 환경에 대한 불만의 영이 생겨나,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현재의 기회들을 유익하게 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의 여러 동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격려가 되고 소망을 품게 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학업에 열심을 내고 있으며, 전반적인 학업 성취도도 훌륭하고, 말하기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며, 신앙 활동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 중 다수가 그리스도를 위해 진심으로 열심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의 기도회는 생명력이 넘칩니다. 그들은 시내 교회와 연계된 두 곳의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시골의 다섯 곳 안식일 학교(Sabbath-schools)에서도 교사로 봉사하고 있으며, 그중 한 곳에서는 14명의 교사 중 6명이 우리 학생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거리로 나가 낯선 이들을 교회로 초대하며, 노방 전도를 위해 학생 중 한 명이 쓴 전도지 오천 장을 사비로 인쇄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도지는 우상을 버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하는 내용으로, 학생들은 개인 전도를 할 때 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인과 병자를 방문하여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글을 가르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월 8일에는 학교와 대학을 위한 세계 기도의 날에 동참하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한 해 동안 질병이 많았습니다. 1월에는 최상급 반 바로 아래 반의 전도유망한 학생 정창윤(Cheung Chang Yuni)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동급생들이 마지막 애정의 표시로 약 1마일 떨어진 기독교인 묘지까지 운구했습니다. 보통 품팔이꾼들이 하는 이런 궂은일을 학생들이 직접 한 것은, 복음이 생각의 습관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기술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스스로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근로부(manual labor department)에서는 33명의 학생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반나절 동안 일했고, 그 대가로 식사와 학비, 그리고 난방과 조명이 제공되는 방을 받았습니다. 책과 옷은 본인들이 마련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일은 인쇄실, 학교 농장, 도급 노동, 지도 그리기, 필사, 짚신 삼기, 그리고 관리인 보조 등이었습니다. 경험 없는 학생들의 노동은 필연적으로 미숙하고 어느 정도는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들의 노동 수익은 학생들의 기숙에 드는 전체 비용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에 달했습니다.

옮긴이 덧붙임.

윌리엄 베어드(배위량) 선교사의 1903년 평양 아카데미(훗날 숭실학당) 연례 보고서입니다. 복음이 무너뜨린 사회적 장벽과 참된 사랑의 실천, 세속적 유혹을 이겨내는 연단, 노동의 존엄성과 자립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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